기호학의 근원은 고대 점성술과 마술에 이르기까지 까마득하게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문자나 부호가 신비로운 힘을 가진 신성한 대상과 연결된다고 믿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은 기호학의 시각과 유사하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기호학은 20세기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함께 태동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기호학의 짧은 ‘공식적’ 역사에서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뼈대로 한 전통적 기호학과 다른 길을 걷거나 반기를 든 기호학 연구는 무수히 많았다.

기호의 고전적 정의는 지금과 달리 ‘다른 것을 대표하는 그 무엇’ 정도였다. 고대 스토아 학파는 오늘날 우리가 의학적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대표적인 기호의 예로 설명하기도 했다.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열이 났음을 짐작하는 식이다. 스토파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동물 울음소리와 같은 자연적 기호와 인간의 언어와 같은 규약적 기호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0년대부터 그레마스를 중심으로 한 파리 학파는 인간의 몸, 감정의 문제를 기호학적으로 다루는 소위 ‘열정 기호학’을 이끌었다. 소쉬르로부터 탄생한 구조주의 기호학은 한동안 이성적이고 합리적 측면에 치우쳐 있었다. 소쉬르가 생각하는 기의는 감각적 세계와 대립하는 관념적, 정신적 세계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 못지않게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사조가 펼쳐지면서 인간의 감성적, 신체적 반응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 전반으로 ‘기호’의 외연이 확장됐다. 그레마스는 이끌림과 거부감 등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 반응 역시 ‘기호’로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소쉬르와 함께 현대기호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미국의 논리학자 겸 철학자 퍼스는 숫자 ‘3’에 집착했다. 따라서 그는 소쉬르가 기호를 기의-기표의 이원적 구조로 나눈 것과 달리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도상은 초상화, 지도와 같이 가리키는 대상 자체와 닮은 기호를 지칭한다. 지표는 풍향계, 의학증상, 무언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대상과 인과적 관계를 맺으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를 의미한다. 대상을 가리켜야만 결과적으로 기호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기호인 상징은 표음문자처럼 기표와 기의가 자의적 관계로 맺어진 기호다.

북미기호학계에서는 기호학이 실생활의 언어사용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북미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미기호학계에서는 꿀벌의 신호전달도 하나의 기호로 보는 동물기호학이 발달하기도 했다. 또 인간, 사회, 문화뿐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까지도 기호작용으로 보며 ‘기호’를 자연현상으로까지 확대했다.

세계기호학회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제스처, 인공지능, 서예, 유머, 춤 등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방대하고 무궁무진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물기호학, 컴퓨터기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과 기호학이 접목되고 있다. 이처럼 ‘기호’는 우리가 그들을 발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며 항상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도 기호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기호가 될 수 있다. 퍼스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기호로 가득 차 있으며, 기호가 곧 우주인 만큼 기호학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흥미로운 분석결과를 쏟아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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