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20대 청년들이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이 옳다면 지금 대한민국에는 분명 미래가 희박하다. 경쟁은 어찌할 도리 없는 사회적 삶의 본질이 되었고 사람들에겐 승리와 낙오만이 유일한 선택으로 주어진다. 대학도 더 이상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경쟁으로 가장 안정적인 삶을 택하려는 욕구가 팽배해지는 셈이다. 이 모든 일을 거대한 구조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개인의 박약한 의지 탓으로 돌리는 것도 어느덧 진부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루 중 많은 부분을 ‘공강(空講)시간’이라 불렀고, 누구나 매진하기 때문에 이제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스펙’에 전전긍긍했으며, 경쟁에 재진입하기 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생활을 ‘잉여’의 삶이라고 지칭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장래희망을 ‘잉여인간’이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이렇게 가차없는 경쟁의 논리에 투항한 대학을 미련 없이 떠나갔다. 아니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의 용기에 공감하기도 했고 자성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서 대책 없는 객기를 나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그의 대의에 동참한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그가 우리 사회에 일으킨 파장은 결국 미미했다. 그의 결단이 ‘문제’가 되기에는 우리 사회에 개인의 존재론적 결단을 요구하는 사회적 이슈들이 이미 많이 존재하고, 대학을 경쟁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세력들에게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버린 지금, 그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나는 묻고 싶다. 경쟁을 벗어나는 일을 선택한 삶은 정말 무의미한가.
그러나 시인 김수영(金洙永)의 말대로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때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도래할지 모른다. 나의 학생들 가운데 절반은 여전히 경쟁이 아닌 삶을 희구하고 학점과 연봉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지는 않을 태세며, 비록 근사한 꿈은 아닐지라도 꿈꾸는 일을 잊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들이 제2, 제3의 김예슬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의식 있는 사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불온한 상상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안온한 삶을 불편해하는 올바른 ‘잉여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잉여’의 삶을 꿈꾼다면 5월이 가기 전 영화 <경계도시2>와 <작은 연못>을 챙겨 보길 권하고 싶다.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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