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특집]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유신정부가 막을 내리고 잠시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 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다시 암흑기로 접어든다. 1980년 비상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치솟았고 이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부터 1987년 6월민주항쟁까지 사회 각 분야 사람들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언제나 사회를 향한 날 선 발언을 담은 대형 걸개그림과 벽화 등이 함께 했다. 이렇게 80년대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술인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린 그림을 ‘민중미술’이라고 한다.

◇민중미술, 민주화를 들고 일어서다

민중미술은 기존의 미술사조가 아카데미즘과 미학주의에 치우쳐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에 회의를 느낀 미술가들이 모여 1979년 ‘현실과 발언’을 조직하면서 본격화됐다.
6월 항쟁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최경배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1987)는 당시 그림을 통해 군부탄압에 저항하고자 했던 민중미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판화가 오윤의 「노동의 새벽」(1985)은 가속화되기 시작한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고달픔을 보는 이의 마음에 아로새긴다. 그런가하면 신학철의 「묵시802」(1980)는 부조리한 현실에 침묵하는 소시민을 비꼰다. 잘난 구두든, 요염한 부츠든 현실을 외면한 이상 그것은 구린내 나는 신발일 뿐이라는 것이다. 독립 큐레이터 전승보씨는 “민중화가들은 독재정권 등을 비롯한 사회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맞섰다”며 “판화, 걸개그림, 조각물 등 기존의 미술사조에선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표현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신학철의 「묵시82」로 당시 군사 정권의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고 있는 소시민을 비꼰다.
사진: 기획착상공간 산방 제공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자 했던 이들의 활동은 결코 제도권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다. 1980년 10월 17일, 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 있던 전시관의 수장들은 「현실과 발언」전의 작품들이 불온하다며 ‘전시불가’ 판정을 내렸고 전시 개막일에 전시장의 전기 스위치를 모두 꺼버렸다. 또 1985년 7월 13일, 미술인들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기획한 「한국미술 20대 힘」전 역시 불순하다는 이유로 경찰이 난입해 작품을 강제 철거하고 작가 19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민중 화가들은 굴하지 않고 ‘민족미술인협회’를 조직, 80년대 후반까지 꾸준한 작품 제작을 통해 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적 발언’이란 족쇄에 붙들린 민중미술, 변화를 꾀하다

하지만 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어느 정도 민주화가 달성되고 냉전이 종식되는 등 국제정세가 변하면서 민중미술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노원희 교수(동의대 미술학과)는 “시대가 안정되면서 저항의 대상이 모호해지고 시위문화가 위축됐다”며 “민중미술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 줄어들면서 작가들의 활동도 미미해졌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민중미술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오광수씨는 저서 『한국현대미술사』를 통해 “민중미술은 지나치게 메시지 위주이기 때문에 미술의 도구화라는 부정적인 비판도 피할 수 없다”며 “예술작품으로서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은 80년대 민중미술이 국립미술관에 전시될 정도로 제도권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알림과 동시에 뚜렷한 비판대상을 잃고 예술적 한계에 직면한 작품들의 나열, 곧 ‘민중미술의 장례식’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시대가 변하면서 한계에 부딪힌 민중미술은 이후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단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술에서 벗어나 사회전반과 더불어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더 넓은 의미의 민중미술로 거듭난 것이다. 윤영석 설치미술가는 「유토피언의 관」(1995)에서 거대한 시체실에 10개의 관을 나열하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등을 통해 대중이 겪은 슬픔을 표현했다. 또 구본주 조각가는 ‘민중’의 정의를 기존의 ‘사회·정치적 억압으로부터 고통 받는 자’에서 ‘생활에 찌든 소시민’으로 확대했다. 「이대리의 백일몽」(1993), 「파고다 공원에 파랑새는 없다」(1994)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얼굴 속에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발견한다. 이처럼 민중미술은 지역미술운동과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통해 시민과의 소통을 근근이 이어나갔다.

◇계속되는 민중미술, 다시 한 번 역동을 꿈꾸다

현대 민중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를 흡수하고 상업자본주의의 급진적 성장과 다원화시대의 전개를 목격한 신진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더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변대용 작가는 미키마우스 귀가 달린 부처상 「미키붓다」(2007)를 통해 종교적 신념조차 상업문화로 전도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한편 인터넷에 떠도는 성적 이미지를 조합한 박정혁의 「Park’s park V」(2009)은 조작·변형된 여성존재를 통해 남성의 시각이 지닌 폭력성을 고발한다. 그런가하면 다문화 예술그룹 ‘믹스라이스’는 「어떤무대」(2009)를 통해 이주노동자 문제를 조명하고 다문화시대에 인종이란 개념은 무의미함을 주장한다. 김종길 큐레이터는 “이들 작가는 80년대의 치열함을 기억하면서도 90년대의 자유로운 감성을 가진 세대”라며 “정치사회적 병폐를 비롯해 종교, 여성, 인종문제 등 일상생활에 깃든 부조리를 재치 있게 꼬집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80년대를 주름잡던 민중미술의 치열함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일까? 이종구, 노원희 작가를 비롯한 많은 민중미술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각에선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정권의 부패와 탄압을 비판하는 작품 활동이 활발히 전개 중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을 빼곡히 붙인 대형 삽을 통해 4대강 사업을 비판한 김병택 설치미술가의 「삽질공화국」(2008)과 버려진 침대 매트리스, 파이프 등으로 작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정권으로부터 무자비하게 내팽개쳐진 희생자들을 추모한 용산 파견미술인들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 활동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12월에는 4대강 사업을 풍자한 「삽질공화국」(2008)을 놓고 국가정보원이 전시를 주관한 광주 5·18기념문화관에 작품철거를 요구하는가 하면, 용산 경찰서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용산 파견미술인들에게 불법 행위로 연행할 수 있다는 경고 방송을 내보내며 철수를 강요했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이자 현재도 활발히 작품 활동 중인 이종구 교수(중앙대 서양회화학과)는 “경찰이 미술가들을 강제 연행하려 하고 전시회를 취소하는 등 마치 80년대를 연상시키는 구시대적 발상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작품에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인 만큼 사회의 부조리함이 존재하는 한 민중미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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