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공간에 가득찬 자본의 논리
구성원들의 삶의 방향성 강요해
집단화 속에 매몰된 학생사회에
학생 스스로가 관심을 가져야

박지웅
법학과 석사과정

지방선거철이라 그런지 유독 현수막 선거광고가 눈에 띈다. 후보자 저마다 자신이 지역민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광고하고 나선다. 하지만 나는 이런 광고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다른 현수막도 이에 일조한다. 이른바 ‘천안함 희생장병을 추모합니다’라는 조문성 현수막은 정치적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어찌됐건 이러한 현수막들은 이를 거리에 걸어놓은 단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목적만큼은 분명히 달성하는 것 같다. 반면 여과 없는 욕망을 보다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한편 발견한다.

학교 정문에 내려 본부까지 걸어 올라가다 보면 색색의 현수막들을 발견한다. 기업 리크루팅 광고, 동아리 광고, 각종 학술포럼 광고, 어학 강좌 광고들이 그것이다. 대다수 현수막을 차지하는 이러한 광고들을 눈여겨 보며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사회에서 즐비한 호소성 현수막이 최근 들어 학내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 물론 각 선본의 광고는 예외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학정문에 걸린 총학선거 광고 현수막이 초라해 보이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군에서 불의의 사고로 전역하고 나서 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하나 촬영하게 됐다. 그리고 영상편집을 위해 영상자료를 찾다가 1980년 서울대의 모습을 담은 ‘대한뉴스’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러한 구호성 현수막과 각종 팜플렛에 대해 ‘대한뉴스’의 제작자들은 ‘좌경 운동권학생이 선량한 학생들을 선동하여 사회를 혼란에 몰아놓고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멘트를 한다. 물론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10년전 까지도 이러한 모습이 그렇게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물론 내용은 달랐다. 80년대의 현수막이 군부독재의 타도와 민주화정부의 수립에 관한 것이라면, 2000년 우리의 현수막은 다른 형태의 ‘신자유주의 반대와 자주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당시 필자는 이러한 현수막 속의 저항을 고시와 취업열풍 속에서 애써 외면하려 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10년 학내에 즐비하게 걸린 현수막은 결국 우리 시대 대학의 자화상이다. 각종 대기업의 리크루팅 광고와 학원광고 현수막의 열풍 속에 새내기들은 삶의 방향성을 일정하게 강요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학생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 또한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선배들, 당신들이야 이미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에 함몰되려는 노력을 했으니 경쟁에 몰입하는 우리를 비난할 권한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간단한 질문 같아도 이만큼 어려운 질문도 없다. 사회의 그물망이 촘촘해질수록 질문은 오히려 더 복잡해질 뿐이지 해체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학사회의 모습에 필자 같은 ‘퇴물’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소식도 들린다. 고려대의 김예슬 학생이 ‘대학이 더이상 대학이 아닌 산업의 전진기지로 전락한 것을 견딜 수 없어 자퇴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내걸었고 실로 자퇴했다고 한다. 충격적인 일이어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충격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고려대 학생들이나 교수가 그녀가 자퇴한다는 소식에 그녀를 감싸기는 커녕 오히려 그녀를 비난하고 있다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학생들조차 이 거대한 ‘맷돌’속에 갈려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녀의 외로운 이 대자보가 우리 대학에 내걸린 현수막 속에 파묻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필자만의 상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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