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거장, 거장을 만나다

2010년은 예술계에 유난히 의미 있는 해다. 쇼팽과 슈만은 탄생 200주년을, 말러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각각 탄생 150주년과 100주년을 맞이했다. 예술계의 거장인 이들의 사상은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공통분모를 낳기도, 첨예한 대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거장들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주고받을까. 연재 ‘거장, 거장을 만나다’에서는 러시아 극작가 체홉의 「갈매기」(1896)와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의 「라쇼몽」(1950)을 통해 당대를 풍미한 두 작품의 접점을 더듬어 본다. 아래는 구로사와 감독(1910~1998)과 작가 체홉(1860~1904)이 나눈 가상 대담이다.

그래픽: 유다예 기자 dada@snu.kr
구로사와 아키라(이하 구로사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안톤 체홉(이하 체홉): 「갈매기」를 생각하면 늘 그렇다네. 연출가들이 내 희곡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야. 완전 비극이 됐잖나. 딱 코미디에 다섯 푼짜리 사랑이야기인데 말이지. 초연 때는 배우들의 실수연발로 실패하더니.

구로사와: 속상하시겠습니다.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제 「라쇼몽」도 일본 흥행은 참패했었죠.

체홉: 일본에서는 아무도 수상 사실을 몰라서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자네를 닮은 동양인을 긴급 수배해 시상식을 열었다지.

구로사와: 전 그때 우울함을 달래려고 낚시를 다녀왔어요. 아내가 ‘축하해요, 그랑프리랍니다’라고 하는데 심지어 그랑프리가 뭔지도 몰랐죠. 하하. 그나저나 저는 선생님의 「갈매기」라는 작품이 맘에 들었습니다. 가벼운 날씨 얘기, 식사, 잡담으로 엮어진 극이라 일상이 아주 생생하게 그려지더군요.

체홉: 고맙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그 작품은 희곡을 쓰기 시작한 지 안 됐을 때 쓴 작품이라 독백이나 언어적 묘사 같은 소설의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지.

구로사와: 그래서 독특한 느낌이 듭니다. 다른 희곡과는 달리 자살 같은 주요 사건이 극 밖에서 일어나고 무대 위에서는 대사로만 전달되니까요. 옛 연인이 떠난 뒤 한동안 자기 원고를 갈기갈기 찢던 뜨레쁠레프가 무대 밖으로 나가버렸죠. 이어 어머니 아르까지나가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하지 않습니까. 펑 소리가 나고 다들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죠. 밖을 확인하고 온 의사가 아르까지나의 애인에게 속삭여요. “아르까지나를 여기서 좀 다른 데로 데려가 주시죠. 다른 게 아니라 뜨레쁠레프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다니 극 중 백미였다고 생각됩니다.

체홉: 사실 나도 그 부분을 좋아한다네. 자네 영화 「라쇼몽」도 매력적이더군. 범죄 미스테리 영화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진실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지. 나 역시 작품 속에 작가의 해석을 내뱉지 않으려 해왔어.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진실은 왜곡될 수 있거든. 자네가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장면을 세번 반복한 것처럼 나는 각자의 입장을 견지한 다양한 캐릭터의 비중을 조절해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했잖나.

구로사와: 극을 통해선 그저 사실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로군요. 사실의 다양한 측면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은 관객의 눈이니.

체홉: 맞네. 그런 생각의 공통점 덕분에 자네 작품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군. 편집 기법도 흥미로웠지. 산적이 사무라이의 부인을 겁탈하고 미친 듯이 숲 속을 달리는 장면은 역광으로 촬영돼 빛이 화면에 가득 들어차지.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빨려드는 기분이었어.

구로사와: 선생님께선 영화 기법도 많이 아시는군요.

체홉: 아, 그런 기법도 좋았지.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다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구조의 반복 말일세. 장면이 연결되지 않으니 등장인물들의 소통 구조가 끊겨버리더군.

구로사와: 그러고 보니 선생님 작품의 대사 구조도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대사가 마샤의 말로 시작되죠. “문제는 돈에 있지 않아요.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면 메드베젠꼬가 “그것은 이론이지 실제에서는 다릅니다”라고 받아치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갈등 체계, 대화의 형태를 띠었으나 결국 말이 독백이자 배출이 돼가는 양상이 전개되더군요.

체홉: 즉, 말이란 것은….

구로사와: 소통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저 역시 소통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가능한 쉬운 영화 언어를 쓰면서 예술영화뿐 아니라 대중영화도 표방하는 것은 더 많은 이들과의 소통을 꾀하고자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과 저의 활동 시점이 100년의 차이가 나지만 소통이란 키워드를 도입한 인간 본질 탐구는 계속 이어져 온 것이군요. 뵙게돼 영광이었습니다.



안톤 체홉: 러시아 출생.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오락잡지에 기고한 것이 작가로서 내딛은 첫걸음이었다. 객관주의 문학론을 주장하며 재판관이 아니라 사실의 객관적 증인이 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보았다. 폐결핵을 앓고 있음에도 죄수들의 유형지인 사할린을 찾는 등 인간 해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줄거리의 과감한 생략과 사소한 일상의 재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진실을 끌어냈다는 평을 받는 체홉의 작품들은 현재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대표작은 「바냐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등.

「갈매기」: 젊은 작가 뜨레쁠레프와 그의 연인인 배우 지망생 니나, 그리고 그들 주변인에게 벌어지는 일상을 펼친 연극. 유명 작가 트리고린을 따라 떠난 니나는 3류 배우로 전락하고 결국 유산까지 하며 성공한 작가가 됐으나 니나를 떠나보냈던 뜨레쁠레프의 자살로 극이 마무리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 출생. 일본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에 참가해 작품을 발표하다 조감독을 거쳐 「스가타 산시로」(1943)로 감독에 입문. 진실의 왜곡을 비꼰 영화 「라쇼몽」(1950)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통찰력이 빛나는 휴머니즘과 역동적인 액션표현을 인정받아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개작돼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은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은 「7인의 사무라이」, 「붉은 수염」 등.

「라쇼몽」: 겉보기에는 명백한 듯한 사건이 당사자들의 서로 다른 진술을 통해 서로 다른 진실이 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사무라이가 자신의 아내와 숲을 지나고 있다. 아내의 얼굴을 본 산적이 그들 앞을 막아선다. 그날 오후 숲 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산적은 체포되고 사라졌던 아내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내 진실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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