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회’라는 번역어가 정착되기 전, 일본의 저명한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1834~1901)는 ‘society’를 ‘인간 교제’라고 번역하곤 했다. 1873년 출간된 영일 사전 『후온소즈 에이와지이』에는 ‘society’가 ‘동료, 동아리’의 의미로 풀이돼 있다. 이러한 초기 번역어들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사회라는 말은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집단’ 정도의 의미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19세기 일본의 번역어들이 딱히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 교제든, 동료·동아리든, 사회든, 우리가 이 말을 중립적인 용법으로 쓰는 한에서, 근대 정치사상이 함축하고 있었던 급진적 비전은 사실상 소거된 셈이다. 사회개념에 대한 모든 진지한 연구들이 강조하는 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자유와 평등을 기본 원리로 하는 인간 생활의 이성적인 질서에 관한 모색과 분리되지 않는다. 캐나다의 헤겔주의자 찰스 테일러가 지적한 것처럼, 근대 ‘사회’의 보편적 제도는 공론영역, 시장경제, 인민자치 등과 같은 호혜적 질서라는 관념의 구현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라는 말의 대중적 용법이 근대 정치사상의 심오한 의미에 무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다. 오늘날 근대 정치사상의 심오한 의미는 한낱 ‘환상’의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사회라는 관념은 현실에서 좀처럼 작동하기 어렵다는 소박한 성찰이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용법에는 담겨있다. 그것은 영화나 문학과 같은 상상력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저씨」(2010)처럼 ‘사적인 복수’를 강조하는 영화에서 통쾌한 기분을 느끼는 우리의 의식 이면에는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사회적인 것이 사실상 부재한다는, 그래서 결국 공평한 무엇인가를 얻고 싶다면 사적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 성찰이 숨겨져 있다. 2000년대 한국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들, 루저·백수·소수자들은 호혜적 질서를 구현하는 사회가 사라진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이다.

사회에 대한 이런 불신을 퍼뜨리는 것은 과연 일부 소설이나 영화, 일반적 어법에 대한 삐딱한 해석일 뿐일까.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고 있으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사청문회를 통해 확인한 것은, 주요공직자들이 하나같이 위장전입이나 부동산투기, 탈세 등을 저질러왔고 그런 잘못들에 대해 변명과 거짓말을 일삼으며 명백한 불법행위들에 대해서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호혜적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외적인 범죄자들이 아니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다퉈 사회라는 개념이 환상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들이 늘 외치는 사회통합이란 말, 그 말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권희철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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