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특이한 종류의 재판이 행해지곤 했었다. 용의자는 주로 부유한 과부들이었는데, 대부분 유죄로 확정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무려 4만명이 넘는 이들은 바로 마녀사냥의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집단 광기라고 밖에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위는 사실 이성의 결과물이었다. 당시의 지배층과 성직자들이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대리 해소하는 동시에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장치로 고안했던 것이다.

최근 타블로란 가수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처음 학력 의혹 규명으로 시작된 움직임은 급기야 타블로라는 개인의 삶 전체와 그의 가족들을 대중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시키는 것으로 확대됐다. 6개월을 넘게 끌었던 논란은 MBC의 특집방송과 경찰 수사를 통해 일단락되는 듯하다. 타블로의 학력이 진짜이며, 그를 검증하려던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여러 잘못을 범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피해자가 명확해진 상황에서, 그렇다면 가해자가 누구이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정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사실은 집단 광기에 가깝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터넷이 생겨나기 전, 진실을 검증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었다. 언론은 사회의 정보 투명성을 높이고 합리적 논쟁을 이끌어나가며, 그것이 바로 언론의 공공성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 타블로 논란에서 공적 행위자로서의 언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네티즌들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이 발생하는 동안, 그리고 그런 오류들에 한 개인이 혼자 힘으로 맞서야 했던 시간 동안, 진실을 위한 사회적 논의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비단 이번 사건뿐 아니라 미국 쇠고기 수입문제나 FTA, 천안함 사건과 같은 사회적 쟁점들에서 반복돼 왔다. 진실이 명확해지지 않았음에도, 특정한 주장이 사회적 논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무시되거나, 불순한 배후가 있거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식의 진실 규명과 무관한 얘기들만 들려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혹을 품지 말라, 무조건 신뢰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비용은 거짓이 진실로 둔갑했을 때의 피해보다 더 작으며, 진실을 기준으로 할 때 진정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열망이 정말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와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수많은 XX녀들, 그리고 타블로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의와 진실을 꿈꾸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마녀가 아니라 성직자에게 향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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