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관기] ‘상호문화적 관점에서 본 레비나스의 철학’ 학술 심포지엄인종 간 충돌이 빈번한 지금, 이방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 고려해야

 

이수경 석사과정
부산대 철학과

지난 14일(금) 부산대 인문한국(HK)의 주최로 레비나스의 타자를 주제로 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강연은 프렛 포쉐(Fred Poche) 교수(프랑스 서부 카톨릭대 철학과)의 「레비나스 철학에서 이방인에 대한 배려-환대가 인정에 우선할 때」와 손영창 박사(부산대 철학과)의 「타자성과 외재성-레비나스를 중심으로」의 순서로 진행됐다.   

자본은 국경을 동요시킨다. 지도에 그어진 확고해 보이는 경계들이 자본이 흐르는 방향대로 잡아 늘려져 겹쳐지고 있으며 그 경계에는 서로 다른 공동체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든다. 따라서 곳곳에서 인종 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포쉐 교수는 그러한 절박한 현실 인식 위에서 이방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레비나스의 얼굴로서의 타자를 내세운다. 사실 타자는 우리에게 낯선 ‘어쩐지 으스스한 자’다. 여기가 아닌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자. 우리는 공동체의 문턱에서 이러한 타자에게 경계심을 드러내며 ‘신분증명’을 요구한다. 타자는 우리에게 자신이 해가 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문화와 소속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그러한 정체성을 통해서 이해되거나 포섭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는 동일성의 체계를 끊임없이 빠져 나가는 자이다. 포쉐 교수는 자본이 허물어 버린 경계 대신에 그 자리에 환대의 문턱을 마련한다. 그 문턱에서 타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곳에서 오는 낯선 자이지만 더 이상 경계를 넘기 위한 신분증명을 요구받지 않는다. 거기서 타자는 인식과 인정의 대상이 아니라 “무한의 흔적인 얼굴”이며, 헐벗은 자로서 나에게 무한의 책임을 요구하는 자다. 타자는 그가 누구든지(quiconque) “식별되기 전에 먼저 환대”받아야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안녕하세요(bonjour)”가 우선한다.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보통 위로되지 않는 세속을 피해 위대한 침묵의 신에게서 셈해지지 않는 위로를 받는다. 그들은 무한(신, 일자) 앞에서 말도 행위도 필요 없는 오롯한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들은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자신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침묵하는 무한에게만 자신을 헌신한다. 그들에게는 신과 닮은 침묵만이 유일한 언어가 된다. 그러한 단독자는 오직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세속의 나와는 영영 만날 수가 없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무한은 신이 아니라 타자다. 나는 무한으로 열리는 타자와 대면하여 그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오롯한 내가 된다. 여기서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분리’돼 있는 타자에 대한 충실한 응답만이 요구된다. 이제 타자와 나 사이의 ‘분리’의 심연은 위대한 침묵이 아니라 언어의 자리이다. 하지만 타자는 그의 외재성으로 인해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레비나스는 내가 포섭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타자에 대해 “자아의 편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말한다.” 인내는 “불투명한 것을 시간 속에서 견디어 내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말의 어긋남은 고립된 주체들 사이의 비극이 아니라 “의식의 투명성의 이면에서 의식의 확실성에 혼란과 충격을 가져오는 근원적 양심의 가책이며 타자의 열림이다.” 타자의 외재성에 대한 사유는 “담론 너머의 의미의 장을 보여주며, 철학적 담론이 실현할 수 없는, 그럼에도 철학적 담론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포섭되는 윤리적 실천의 장을 보여준다.”

심포지엄은 끝이 났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에 대한 물음은 내재적 담론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사유와 실천은 심포지엄 이후(담론 외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수많은 말들이 겹쳐지고 흩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수께끼를 간직하며 그것이 그들을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결코 같은 시간 속에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수수께끼 또는 과잉으로 명명되는 것들만이 보편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부재하는 것만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만남 가운데 숱한 어긋남을 보며, 어긋남 가운데서 묘하게도 만남의 순간들을 경험한다. 우리는 어긋남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며 그런 무력한 순간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하지만 그 무력함을 견뎌 얼굴로서 나타나는 타자에게 응답하는 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인내일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만 타자는 “열려진 외부로서” 나에게 알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패와 좌절 즉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을 거스르려는 몸짓이다. 인내는, 우리의 대화가 도달해야하는 하나의 실체란 없다고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오직 나의 말을 당신에게 풀어두고 당신의 말에 매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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