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스케일과 강렬한 색체가 어딘가 촌스런 느낌을 주다가도 이내 시선을 빼앗아버리는 영화그림간판. 큰 붓을 들고 그림을 썩썩 그려 내리는 모습에서 연상되는 강한 인상과는 달리 이 간판화가가 내놓는 저음의 목소리는 잔잔하다. 1991년 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의 전시회를 거치고 자운영미술학교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자신이 간판쟁이임을 조금도 스스러워하지 않는다. 마지막 간판쟁이인 동시에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 예술의 경계를 기워낼 최초의 간판쟁이인 박태규씨를 만나보자.

대학에서 미술패 활동을 하던 당시 걸개그림과 천장화를 그렸던 이 미술학도는 큰 그림에 매력을 느껴 선뜻 간판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영화간판의 사실적이고 호소력 있는 표현이 와 닿았다”며 “처음 2년간은 간판 시공, 붓 빨기부터 글씨 작업, 소규모 간판 작업까지 도맡았다”고 밝혔다. 조급해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차근히 간판화가의 길을 밟아온 그는 그 후 「동방불패」, 「쉬리」, 「서편제」 등 다양한 영화의 간판을 맡게 됐다.

당시 사람들에게 영화간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박태규씨는 “간판은 영화와 영화관의 홍보수단이자 얼굴이었다”며 “예전에는 간판만 가지고 영화를 볼지 안 볼지를 결정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극장마다 간판 그리는 사람을 둘 정도로 성행이었던 영화그림간판은 이제 모두 출력물에 밀려난 상태다. 간판쟁이라는 직업이 움츠러들고 있다는 말도 무색하게 이제는 그 존재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는 올해 초 오랜만에 「경계도시2」의 간판작업을 하게 됐다. 그는 “광주극장이 특별히 의뢰한 만큼 영화도 의미 있는 것으로 선정했다”며 “얼마 남지 않은 손글씨 간판을 소중히 여겨주니 고마웠다”고 말했다. 간판 가득 들어찬 노교수의 주름진 미간에서는 간첩으로 내몰린 한 교수를 통해 드러나는 한국의 불편한 진실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마지막 간판 작업을 털어냈지만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근 7일(일)까지 열린 2010 광주비엔날레 ‘만인보(萬人譜, Maninbo/10000 LIVES)’에서는 한국영화 간판을 선정해 전시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풍운아」부터 「와이키키 브라더스」까지 영화 인물을 중심으로 그린 간판화를 시대별로 정리했다. 양동시장에서는 시장 상인들의 웃음과 친근한 물건들을 벽화로 담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시장 사람들 일상의 구석구석이 묻어있는 그의 작품에는 어딘지 모를 아련함이 서려있다. 이에 대해 그는 “영화간판의 느낌이 주는 추억이나 강렬함, 선명함 등을 작품에 담아내려 한다”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의 근원을 설명했다.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그저 ‘그림 그리는 사람’인 그가 추구하는 것은 ‘소통’이다. 그는 “미술을 하려면 무게를 잡아야 한다거나 어떤 부류에 들어가야 한다는 틀이 암암리에 작용하는 것 같다”며 “그런 것들이 미술은 어렵다는 인식을 더 심어 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그는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한 포부를 묻는 질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감동을 주며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다른 작품 활동을 하며 더이상 영화 간판을 그리지 않고 있지만 간판으로 함께 호흡하던 이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영원한 간판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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