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기자
학술부

중학교 때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적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괴물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무섭지도 않았고, 재밌지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축축했던 것 같다. 축축한 종이, 퀴퀴한 냄새. 괴물이 나오는 소설에 어울리는 말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도 축축하면서 퀴퀴한 냄새가 났을까.

더운 여름날, 길가에 떨어져있던 박새의 시체를 본 적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길가 한구석에 떨어져있었다.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굳어있는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보드라운 털도, 따가운 햇살도 새의 냉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박새를 놀이터 한구석에 묻었다. 추운 겨울날, 도서관을 지나가다 벤치에 앉아있는 길고양이를 본 적 있다. 꽤 추웠는지 내가 옆에 앉자 고양이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조용히 쓰다듬었다. 매서운 겨울바람도, 오랫동안 밖에 있어 차가워진 털도 고양이의 온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온기는 생명이고, 냉기는 죽음이다. 친구는 할머니 장례식에 간 이야기를 해줬다. 어머니가 “할머니 가시기 전에 손 잡아드려야지”라며 친구의 손을 할머니 손 위로 포개놨다고 했다. 그 손이 너무나도 딱딱하고 차가워서, 친구는 울어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살아있는 인간은 따뜻하다. 고등학교 때 헌혈차에서 헌혈을 한 적 있다. 피가 빠져나가는 호스가 내 팔 위에 얹어져 있었다. 피는 따뜻했다. 괴물도 피가 흐르는 혈관을 갖고 있다. 따뜻한 피가 온몸을 돌고 있는 괴물은, 분명 나와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니고 있었을 테다.

그러니까 괴물은 축축하지도, 퀴퀴한 냄새도 나지 않았을 거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생각한 괴물은 그저 외형이 조금 흉측한 인간일 뿐이었다. 박사가 한 번만이라도 괴물의 살을 만져봤다면 괴물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도 괴물의 온기를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박사는 괴물의 모습만 보고서 너무나 쉽게 재단한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다. 온기와 냉기는 생명과 비생명,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나의 기준이다. 하지만 괴물이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냉기를 지닌 존재면 그를 배척해도 되는가? 비단 괴물이 아닐지라도 ‘냉기’를 지닌 것들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가?

기사를 준비하며 ‘인간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기계가 인간과 다를 것 없이 진화한다면, 인간의 신체가 기계와 다를 것 없이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인터뷰를 하며 괴물이 등장하는 시대에 인간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매번 물어봤다. 그런 논의는 위험하다, 인간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매번 돌아오는 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잊어버리고 다시 고민했다. 고민하면 할수록 인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우월주의이자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등장할 포스트휴먼과 기존 인간인 나의 차이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 생각했다. 새로이 등장할 그들이 훨씬 더 완벽할 텐데 나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문득 괴물이 인간인 세상이 오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괴물을 동정한 것뿐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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