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 독일에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마주하다 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80년대 여성 운동의 흐름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후 문제가 공론화되고 관련 단체가 연합하면서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발족했다.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 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중 독일에서는 현재까지도 운동이 활발하다. 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인 동시에 지난 과거를 기억하는 ‘기억 문화’가 있는 독일에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이뤄져 왔을까. 지난달 독일에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발자취를 좇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독일에 알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파독 간호사의 체류권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재독한국여성모임’과 ‘일본여성회’의 주도로 독일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단체는 1985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 재독한국여성모임 안차조 씨는 “당시 일본 남성의 한국 내 기생 관광 문제에 관한 세미나에서 일본여성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발제했다”라고 회상했다. 비교적 자료가 많았던 일본여성회와 교류하며 재독한국여성모임은 ‘위안부’에 관한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에 김학순 씨의 증언이 나오면서, 재독한국여성모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집중하는 국제연대소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들은 그동안 연대해 왔던 일본여성회와 함께 ‘위안부’ 문제를 독일에서 여론화하기로 결정했다.

그중 국제 심포지엄 개최와 증언집 번역은 독일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독일 내 단체와 연대하는 계기를 마련한 대표적 활동이었다. 1993년 9월에 열린 ‘전쟁과 강간’ 국제심포지엄은 독일과 유럽에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린 최초의 행사다. 남한의 문필기 씨, 북한의 정송명 씨를 포함해 필리핀, 네덜란드, 일본 등지에서 피해자들이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했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 문제를 다뤘다. 또한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전쟁 참상, 나치 독일 시대 위안소 운영 등 전시 성폭력 문제에 관한 폭넓은 논의가 나오며 전 세계적인 여성 연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독일어 번역 증언집.
▲독일어 번역 증언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 여성 피해자들의 증언을 발췌해 번역한 것이다. 당시 번역에 참여했던 재독한국여성모임 강여규 씨는 “일본군 ‘위안부’ 증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읽는 것조차 어려웠고 희생자의 절망적 고통과 수치심도 함께 견뎌야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그가 번역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군의 조직적인 성범죄와 이에 대한 한·일 양국의 오랜 침묵을 향한 분노 때문이었다. 완성된 증언집은 일본여성회와 한국 및 독일 단체에 기증되기도 하고, 증언집 발간 소식이 독일 신문에도 게재되면서 재독 교민이나 독일 여성들이 이를 주문하기도 했다.

▲독일어 번역 증언집.
▲독일어 번역 증언집.

 

이런 활동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조금씩 독일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 시민단체는 ‘위안부’ 운동에 연대하며 독일 ‘위안부’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 현장에 가다

지난달 14일 오후, 평화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집회가 열렸다.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집회는 일본여성회와 코리아협의회 산하 일본군 ‘위안부’ 행동(AG Trostfrauen)을 주도로 베를린의 여러 여성 단체와 함께 매년 진행되고 있다. 

무더웠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집회에는 연대 단체와 독일 시민이 함께 했다. 이날 시위의 1부에서는 일본여성회의 주도로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침묵 시위와 일본 참전 군인의 진술이 낭독됐다. 2부에서는 코리아협의회의 주도로 연대 발언과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진실은 이긴다”, “우리가 역사다”라는 구호가 한국어, 독일어, 일본어, 수어로 울려 퍼졌다. 

코리아협의회 인턴으로 활동하며 이날 집회를 준비했던 루시 사우프 씨는 “날이 더워 많은 사람이 오지 못한 게 아쉽다”라며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주제를 알릴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설령 피해 생존자가 없을 때가 오더라도 언젠가는 일본 정부가 이 범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시민들이 민중가요 ‘바위처럼 ’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시민들이 민중가요 ‘바위처럼 ’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민중가요 <바위처럼>에 맞춰 다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바위처럼>은 한국에서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때마다 사용하는 민중가요다. 노래가 흐르고 코리아협의회의 운동가가 춤을 추자, 시위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 유럽 여행 중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시위에 참여하고자 베를린에 방문했다는 설예원 씨(자유전공학부·18)는 “춤을 추는 시민들을 보니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사진과 생애사가 적힌 패널에 헌화하는 시민의 모습.
▲피해자의 사진과 생애사가 적힌 패널에 헌화하는 시민의 모습.

한편 당일 집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국가가 표시된 지도와 피해자의 사진과 생애사가 적힌 패널이 전시되기도 했다. 한국, 네덜란드, 대만, 필리핀 등 피해자들의 다양한 국적은 일본군 ‘위안부’가 전 세계적인 문제임을 보여줬다. 이후 패널 아래 헌화하며 피해자를 기리는 행사가 진행됐다. 이때 패널을 들고 있던 설예원 씨에게 몇몇 시민이 다가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려달라”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설 씨는 “머나먼 독일에서 왜 진실이 이긴다고 외쳐야 했는지 확인 받는 기분”이라며 소감을 말했다.

▲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시위를 마치고 참여자들이 단체 촬영을 하는 모습.
▲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시위를 마치고 참여자들이 단체 촬영을 하는 모습.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미래를 좇아서

코리아협의회 내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코리아협의회 내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취재원들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미래가 낙관적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피해 생존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과 은폐,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위안부’ 운동의 동력을 잃게 한다. 그럼에도 운동가들은 ‘위안부’ 문제가 지금도 벌어지는 전시성폭력 문제이자 인권 문제라는 점에서 계속해서 싸울 것을 다짐한다.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는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성폭력의 고리를 끊는 것이 우리의 주안점이며, 이를 위해서는 여성이 침묵을 깨고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취재원들은 앞으로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과 ‘교육’이라 입을 모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기억되기 위해 보존과 연구는 필수적이다. 코리아협의회에서 박물관을 조성해 방문자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위안부’ 문제가 더 연구되고 정리돼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풍경세계문화협의회 이은희 대표는 ‘위안부’가 식민지 시기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운영한 성노예제였다는 역사적 맥락이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일본군 ‘위안부’ 성 문제에 관한 연구와 정리가 계속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래를 위한 교육 역시 앞으로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주요 안건이다. 한정화 대표는 “우리의 주목적은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코리아협의회가 소녀상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대표는 추후 독일의 교과서·교육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다뤄지고 교육될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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