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 기자(사회문화부)
서윤 기자(사회문화부)

미국에서 낙태의 권리는 헌법상 기본권이었다. 과거형으로 쓴 까닭은 이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1973년 낙태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당시 가히 획기적이라는 평을 받은 이 판결을 미국 사회가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누군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합리적으로 절충했다며 긍정했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많은 주가 각자의 정치·종교·역사적 배경에 따라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낙태 규제를 꾸준히 입법했다. 대부분 낙태를 지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선고된 이후 레이건 정부와 부시 정부 등 보수 성향을 지닌 공화당 정권이 길게 이어진 것도 판결의 취지가 온전히 실행되기 어려웠던 이유였다. 

미국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낙태가 낙인의 역사를 지닌다고 이야기했다. 낙태 수술을 제공하는 병원이 시위대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2009년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가 낙태 시술을 제공하던 산부인과를 검찰에 고발한 우리나라의 사례를 떠올리게 했다. 낙태를 제공하는 미국의 산부인과를 구글링했더니 낙태 클리닉으로 위장한 종교 단체 ‘위기 임신 센터’(Crisis Pregnancy Center)가 섞여 나오는 일도 예사였다. 인터뷰에 응한 낙태 경험자들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었을 때도 의료 접근권이 열악했다고 말했다.

낙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이후 텍사스 주는 낙태를 전면 금지했다. 텍사스 주민은 이제 낙태가 합법인 다른 주로 가야만 낙태를 할 수 있다. 원정 낙태라는 말을 취재 과정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원정 낙태는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해외 취재를 간 기자들과 함께 텍사스 주민이 원정 낙태를 한다면 겪어야 하는 여정을 그대로 경험했다.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로 가려면 비행기로 5시간을 이동해야 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호텔은 하룻밤에 20만 원을 내야 묵을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낙태의 권리는 말로만 외칠 수 있는 권리일 뿐이었다.

내가 만난 낙태 경험자들이 낙태를 결심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해서, 아이를 양육할 환경이 아니어서 등. 낙태는 범죄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다. 낙태를 권리라고 칭하는 데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역시도 오랜 낙인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판결로 낙태는 범죄가 아니라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러나 범죄가 아니라는 선언만으로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3년째 이어지는 중인 입법 공백이 조속히 끝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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