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주 편집장
구효주 편집장

이번 ‘인권헌장에 대한 미래 세대 인식 조사’ 결과 발표 포럼에서도 부침을 겪은 조항은 역시나 제3조 1항 및 2항이었다. 1항은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차별 금지 사유로 규정하고, 2항은 “자신의 언행이 차별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할 의무”를 다루고 있다. 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측의 주된 논거는 이런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표현의 자유’가 과연 모두에게 동등하게 보장될 수 있었던가?

사회의 모든 공간이 그렇듯, 대학에서의 표현의 자유도 다수의 이익과 관점에 따라 형성되기 쉽다. 소수자는 다수가 불쾌감 혹은 불편함을 느낀다는 이유로 자신의 경험에 관한 표현을 내세우지 말라고 요구받는다. 소수자가 느끼는 불쾌감에 관한 논의는 뒷전이다. 소수자가 침묵을 깨고 혐오 표현에 대항하려면 막대한 심리적·사회적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겨우 목소리를 내면, 그마저도 ‘극단’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일쑤다. 대학이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라고는 하지만, 오가는 혐오 표현 속에서 누군가는 침묵하고 있다.

그날 포럼에서도 한 청중은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을 든 사람들을 아주 쉽게 ‘퀴어’로 명명해버렸다. 이는 인권헌장의 지지자를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발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퀴어였다면 그들이 겪었을 부정의함과 차별을 쉽게 토로하지 못하게 심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성 소수자가 비합리적인 부담을 감당하지 않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힐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우려면, 그간 성 소수자가 겪었던 “사회적 차별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장려”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인권헌장에 차별 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명시하는 것은 침묵을 깨는 출발점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혐오 표현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원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대학이라는 공동체의 특성을 고려하면 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은 온당치 못하다. 혐오 표현을 악의로 발화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의도치 않았지만 누군가를 혐오하는 발언이 나왔을 때다. 이럴 때는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 불쾌감을 감수하고 어색한 침묵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 언행에 대응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조성돼야 하지 않겠는가. 인권헌장 제3조 2항이 차별을 조장하는 언행에 대해 ‘금지’가 아닌 ‘주의’할 의무를 요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 인권헌장을 반대하는 비율은 3.83%로 매우 낮았고, 일부 조항에 반대하는 사람은 전체 5,363명 중 53명뿐이었다. 이는 그간 서울대가 인권헌장을 추진하지 못했던 특정 조항이 이미 대학 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는 소수의 극단적이고 비약이 담긴 반대 측의 주장을 찬성 측의 주장과 같은 길이를 할애해 다루면서, 객관성이라고 포장된 ‘거짓 등가성’(false equivalence) 뒤에 숨은 언론의 책임도 크다. 인권헌장을 반대하는 측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지적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중 다수가 소수자를 향한 혐오 또는 ‘대학’의 인권헌장과는 무관한 영역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지적을 서울대 인권헌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부차적인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아주 손쉬운 해결책으로 찬성과 반대 측의 분량을 맞추고, 현실과 괴리되는 사실을 나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볼 일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게 현실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봐야 한다.

차별을 경험한 사람 중 86.5%가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조사 결과는 차별적인 발언에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이상향이 아득히 멀었음을 방증한다. 인권헌장은 ‘미래’의 더 나은 서울대를 위한 규범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성별 정체성· 거주·연구·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이번 조사에 목소리를 낸 모든 사람, 즉 ‘현재’를 위한 규범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서울대인을 위해 인권헌장은 제정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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