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긴축한 연구실 다수… 타격 구제하려면 구체적 R&D 예산안 필요해

 

정부의 추상적인 R&D 예산 일부 증액은 무의미

예산 삭감안 발표만으로 연구 장비 가동 중단·인력 해고돼

특별위원회 내년 1월 31일까지 임기 연장

학부생‧대학원생, “ R&D 예산 원상 복구까지 행동할 것”

‘R&D 예산 삭감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에서 유승우 씨가 발언하고 있다.
‘R&D 예산 삭감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에서 유승우 씨가 발언하고 있다.
'R&D 예산삭감 합동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 구조를 설명하는 이준영 수석부지부장
'R&D 예산삭감 합동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 구조를 설명하는 이준영 수석부지부장

지난 9월 1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4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 대비 16.6%(5조 2,000억 원) 삭감된다. 이례적으로 이뤄진 R&D 예산 삭감으로 학계의 반발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10월 1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종호 장관은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R&D 예산 삭감에 따른 학생 인건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정부는 지난 3일 국회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삭감된 R&D 예산을 일부 증액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뒷수습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구성원들은 여전히 R&D 예산 원상 복구를 요구하고 있다. 『대학신문』이 R&D 예산 삭감에 대한 서울대 대학원생과 학부생의 대응을 짚어봤다.

 

◇명확한 증액 계획 없이는 피해 구제 효과 미미해=지난달 25일 연세대 교육화학관에서 열린 ‘R&D 예산삭감 합동간담회’에서는 정부의 R&D 예산 일부 증액 방침을 성토하는 대학원생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울대 대학원총학생회(원총)의 주도로 열린 이번 간담회에는 △연세대 대학원 총학생회 △고려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대학원생노조)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국가 과학기술 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참여했다.

간담회에서는 정부가 제시한 R&D 예산 증액 방침이 R&D 예산 전반에 걸친 삭감으로 발생할 피해를 완화할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이어졌다. 대학원생노조 이준영 수석부지부장은 “정부가 유망하다고 판단한 일부 분야의 사업 예산을 증액해도 예산이 삭감된 다른 사업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제시한 증액안이 모호함도 지적됐다. 원총 이도연 회장(보건대학원 박사수료)은 “현재 정부가 제시한 증액안에는 연구 사업이 구체적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증액되는 금액도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기존에 삭감된 사업의 예산을 증액하는 방식인지, 기존의 삭감은 유지한 채 새로운 연구 과제를 도입하는 방식인지도 알 수 없다”라며 “후자의 경우 사실상 지금의 삭감안과 차이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삭감안 발표 이후 얼어붙은 연구 환경=구체적인 계획 없는 정부의 R&D 예산 일부 증액 방침이 현장의 피해 구제에 실효성을 보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연구 현장은 정부의 종전 R&D 예산 삭감 발표로 벌써부터 얼어붙고 있었다. 간담회 발제에서 서울대 R&D 예산삭감 태스크포스(TF) 김예린 팀장(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은 “현재 정부의 삭감안에는 어떤 사업이 얼마나 삭감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온 바가 없다”라며 “여러 연구실에서 연구 자재를 미리 구매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등,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긴축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서울대 자연대 석박사통합과정생의 경우 벌써 인건비가 30%씩 삭감됐다”라며 “내년도 사업비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삭감되는지 알려지지 않아 지금쯤이면 나와야 하는 정부 R&D 과제도 발표되지 않았다”라고 대학원생들의 막막함을 호소했다.

특히 현재 한국 연구 생태계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종합대학 대학원생의 인건비 문제도 제기됐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신명호 정책위원장은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은 계약으로 인건비가 보장되고 과학기술정부통신부 산하 과학기술연구원은 연구 개발 적립금으로 인건비를 충당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종합대학에서는 인건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R&D 과제로 대부분의 연구비를 충당하는 종합대학 연구실의 경우, 연구 수행은 물론 당장의 인건비 지급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간담회에서는 R&D 예산 삭감이 연구 환경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반적인 연구 인프라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이준영 수석부지부장은 “지출 목적에 따라 정부가 사업 단위를 출연하는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에서는 일괄적으로 책정된 사업비에서 연구 과제에 직접 사용되는 직접비와, 인건비‧연구 장비 비용‧재료비‧행정비와 같은 간접비가 사용되는 구조”라며 현재 한국의 연구 예산 구조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행정 인력과 연구 인프라까지도 사업 비용에 묶여 있다 보니 R&D 예산 삭감은 연구 진행의 문제를 넘어 연구 생태계의 문제가 된다”라고 강조했다.

 

◇대학원생, R&D 예산 삭감에 강한 우려 표해=간담회에서 공유된 익명의 대학원생 의견들은 R&D 예산 삭감을 둘러싼 불확실성에 하나같이 격앙돼 있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과제 신청 경쟁률의 상승으로 대학 연구실은 정부출연연구소에 밀려 지원받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대학 연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의견이 공유됐다. 이외에도 “예산 부족 문제로 연구실에 들어오고 싶다는 학부생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R&D 예산에 비리가 있더라도 현 정책은 몸통이 아니라 말단을 잘라내는 꼴이다”와 같이 정부의 방침에 반감을 표하는 반응이 다수였다.

한편 이미 연구 인력 유출이 우려되던 가운데 R&D 예산 삭감은 치명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R&D 예산이 삭감되기 전인 2019년 국가기술자문회의 외 6개 전문연구정보센터가 진행한 ‘이공계 대학원생 처우 개선을 위한 설문 조사’에서는 낮은 인건비와 밀도 높은 업무 시간 등 대학원생의 열악한 연구 환경이 드러났다. 심지어 해당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는 입학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거나 해외 유학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김예린 팀장은 “무너진 신뢰와 불안정한 처우는 이공계 연구자 인력 유출을 심화시킬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학부생들도 R&D 예산 삭감 전면 재검토 요구=한편 학부생 역시 정부의 삭감된 R&D 예산안 및 정부의 일부 증액 방침에 반발하며 조직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지난 9월 17일 서울대 물리천문학부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경희대 우주과학과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등과 함께 ‘천문‧우주항공 분야 유관 학과 과학기술 R&D 예산 삭감 대응 공동행동’(천문학과 공동행동)에 참여하며 정부의 R&D 예산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대학신문』 2023년 10월 9일 자) 천문학과 공동행동은 유관 의원실과의 면담을 통해 설문조사로 수합된 학부생의 입장을 전달하는 한편 9월 말에는 삭감 저지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10월 6일에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R&D 예산 삭감이 우주산업 분야 위축에 결정타가 됐다며 정부의 방침에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총학생회(총학)는 지난 9월 24일 ‘정부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부의 R&D 예산 편성 관련 사안에 대응하며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특별위원회 오정민 위원장(지구환경과학부·20)은 정부의 이번 예산 일부 증액 방침에 대해 “인건비가 증액되는 형태를 알 수 없어 관련 대응에 이를 반영하기 어렵다”라며 “원총과 연계하며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학은 지난 10월 17일에는 연세대 총학, 카이스트 총학 등 11개교와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대학생 공동행동’(대학생 공동행동)을 결성했다. 대학생 공동행동은 10월 30일 R&D 예산 삭감 백지화 및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지난달 7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단 간 만남에서 소통을 위한 협의체를 요청했다. 이어 지난달 13일 개최한 국회토론회에서는 예산 삭감에 따른 우려를 표하고 추후 예산 편성 과정에서 대학생 의사결정 과정 참여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총학의 이같은 활동에 대해 지난달 29일 특별위원회가 개최한 ‘R&D 예산 삭감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에서 특별위원회 나세민 부위원장(항공우주공학과‧21)은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고 대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면서 R&D 예산 삭감 관련 정보를 학우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국회, 행정부, 비정치권 유관기관과 면담을 진행했다”라고 활동을 보고했다.

이런 학생사회의 대응 방향성에 대해 특별위원회가 개최한 공청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공청회에서 천문학과 공동행동 문성진 의장(물리천문 학부·21)은 “서울대 학부 졸업생 3할이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수많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학생사회가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밝혔다. 공청회에 참석한 유은강(생명과학 부·22) 씨는 “총학의 대응 시기가 늦어진 게 가장 큰 문제였다”라며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라고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공청회에 참석한 유승우 씨(물리천문학부·20)는 “과학기술계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책이 통과되려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과학기술계의 영향력이 적기 때문”이라며 “정책 통과 과정에서 이공계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서울대 학생들, R&D 예산 삭감 대응 지속한다=서울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은 내년도 예산이 확정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갈 것이며, 삭감된 R&D 예산안이 통과되더라도 대응을 멈추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도연 회장은 “예산 삭감이 확정돼도 피해 사례를 수합해 내후년 예산에 반영될 수 있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성진 의장은 “원상 복구가 힘들더라도 최대한 예산 삭감이 덜 이뤄지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내후년 예산에는 삭감이 없도록 할 것이다”라고 향후 목표을 밝혔다. 마찬가지로 나세민 부위원장은 “제52차 총운영위원회 의결을 통해 특별위원회의 임기가 1월 31일까지 연장됐다”라며 “법적으로 예산안은 12월 2일까지 국회 본회의에서 심의가 확정돼야 하나, R&D 예산 논의 장기화로 지연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임기 연장의 이유를 전했다. 또한 대학생 공동행동의 향후 계획에 대해 제63대 총학 「정오」 신의식 전 중앙집행위원장(원자핵공학과·21)은 “국회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위해 요청한 협의체를 바탕으로 입법부를 넘어 행정부에도 학부생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할 것”이라며 “예산 원점 복원을 넘어 연구 환경 개선을 궁극적인 목표로 활동하겠다”라고 밝혔다.

 

사진: 최수지 기자

susie2003@snu.ac.kr

이수진 수습기자

polarbear2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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