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윤식 명예교수

세상은 그대를 두고 남의 글 앨 써 읽고 이를 쓰고 가르치기에 삶을 탕진한 사람이라 하는데 사실이냐. 그렇다면 필시 그 속에는 작가 박완서의 글도 들어 있되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겠는가.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 점이 조금 궁금하다. 멍석을 깔아놓겠으니 한번 말해 보겠느냐. 원고 청탁서치고는 조금 유별하긴 해도 이에 내가 응한 것은 오직『대학신문』이었기 때문.

12개로 흩어졌던 대학들이 일제히 강물처럼 관악산으로 달려간 때를 아시는가. 월남전이 끝장나던 1975년도였지요. 당시 신문들은 이삿짐을 실은 트럭들이 전쟁을 방불하듯 관악산으로 향하는 사진들을 대문짝만 하게 싣지 않았던가. 그 사진의 잔상이 지금껏 내 마음 바닥에 깔려 있음은 내가 젊은 교수였기 때문. 아무리 식당 하나밖에 없는 황량한 관악산일지라도 이제부터 내가 살아야 할 터전. 곧 화전민. 이는 비유가 아니라 현실 자체였던 것. 학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시대 탓도 있었겠지만 갈피를 잡기 어려웠으니까.

문학(또는 문학적 현상)에 그들의 관심이 쏠린 것도 이 때문. 내 강의가 문학 강의이기도 했기에 이 점이 선명히 감지되었던 것으로 회고되오. 강의 도중 뜻하지 않은 질의가 돌출하곤 했으니까. 선생이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작품을 풀어보라는 것 등등. 피할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월평을 써 왔으니까. 월평이란 그 달 그 달의 작품을 평가하는 저널리즘의 한 형식이니까. 나는 망설임도 없이 박완서의 「카메라와 워커」(1975)를 들었소. 절대로 인문사회대학을 가지 말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공과대학을 가라는 가족의 압력에 따라 공대를 나와 강원도 탄광에 쑤셔박힌 조카를 만나는 고모의 마음을 담은 이 작품을 어째서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었을까. 두말하면 군소리. 이데올로기에 풍비박산 난 가문의 외아들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소. 강의를 끝내고 연구실에 들어와 숨을 고르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소. 장본인은 여학생. 쭈뼛쭈뼛하던 그녀의 말인즉, 박완서의 딸이라는 것. 그러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라는 내 표정을 읽은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듯 서둘러 물러나지 않겠는가. 그렇다. 어쨌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소. 그로부터 달포쯤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좀처럼 노크 소리 없는 내 연구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소(그 무렵 내 연구실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노크만 하고 그냥 들어올 것). 들어온 사람은 자주색 한복 차림의 중년급 여인. 박완서라 했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서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에 없소. 「나목」(1970)을 대중소설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되어 박완서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1976)가 나왔소. 후기엔 이렇게 적혀 있소. “이렇게 빠르게 내 작품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된 것은 평소 일면식도 없었던 김윤식 교수의 주선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컸다”라고.

『대학신문』이 기억해야 될 또 하나의 장면은 2006년 5월 17일에 일어났소. 관악산 대학 명예박사(총 90여 명 중 대부분이 외국인. 국내인 여자로서는 제1호)를 수여하는 날. 나도 구경하러 갔소. 이 대학 역대 두목들이 이상한 모자를 쓰고 버티고 있는 단상에 작가 박완서도 있지 않겠소. 꼭 같이 이상한 금줄 달린 모자까지 쓰고. 가관이랄까, 기관이랄까. 박씨의 첫 마디는 이러했소. “먼저 절대로 안 받을 것처럼 강하게 반발을 해 실무자들을 당혹스럽게 해드렸던 점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라고. 그런데 왜 마음을 바꿨는가. 긴 말이 이어졌는데 줄이면 이렇소. 1.4 후퇴 이후 서울에 남아 노모와 조카를 먹여 살려야 했다는 것. 용케 미군 PX(신세계 백화점)에 취직이 된 것은 오직 서울대생이라는 조건 덕분이었다는 것. 그러고 보면 씨는 50학번. 이쯤 되면 서울대학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후에도 서울대학 학생이라는 레테르가 저를 따라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고, 그 직장에서 알게 된 남자와 결혼해서 똘똘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고……” 이만하면 어찌 서울대학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귀엔 그렇게 들렸소. 씨의 타계 후 거금을 이 대학에 기부한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씨의 많은 소설들을 읽으며 씨와 나는 함께 세월을 헤쳐 왔소. 가시밭도 자갈길도 있었고 평지도 시냇물도 있었소. 때로는 내 앞에 놓인 늪의 깊이를 몰라 망설일 땐 문득 씨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할까를 생각하곤 했소. 물론 작품상에서 말이외다. 그러나 작품 바깥에서라면 어떠할까. 지난 해 여름 씨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받았소. 미국 시인 프로스트의 시에서 표제를 딴 이 산문집을 펼치다가 문득 나는 작품 바깥이라는 착각에 잠시 빠졌소. 우연히라도 만나기만 하면 따져보겠다는 것. 씨는 망설임도 없이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 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p.26)라고 했것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라? 데뷔작 「나목」에서부터 일관되게 외쳐온 “나만 억울하다!”의 육성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대목을 이해는 하지만 늘 불만이었소. 이데올로기만 장땡일까 보냐. 세상 어디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있을쏘냐. 태어나서 억울하고 죽어서 억울하고, 이래서 억울하고 저래서 억울한 법. 80쯤 되면 이 경지에 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하늘은 내 이런 질문을 앗아가고 말았소. 삼가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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