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상식의 시즌이다. QWER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에서 가장 큰 음악 시상식 중 하나에서 베스트 밴드 퍼포먼스상 후보에 올랐다. QWER은 여성 스트리머 두 명과 일본 아이돌, 틱톡커로 활동하던 여성 네 명을 모여 만든 아이돌 걸밴드다. 이전에도 인터넷 방송 BJ들이 TV 프로그램에 일회성 혹은 고정 패널로 출연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 먹방 BJ들이거나 인터넷 방송을 통해 크게 수익을 올린 이들이 그 대상이었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산업이자 그것만의 정서가 확실한 아이돌 산업에 소속사를 통한 데뷔가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해 데뷔한 이들이 정식 아이돌이 된다는 것은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특정 신체 부위의 강조 등을 통해 남성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방송을 진행하던 여성 BJ들의 데뷔와 유명세는 특히 페미니스트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됐다. 

QWER을 둘러싼 논쟁의 지형은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멤버 중 일부가 스트리머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벗방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양지’로 나와서는 안 될 존재들로 여겨진다. 아이돌 산업과 벗방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에서 제기되는 청소년 유입 등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문제의 원인과 맥락을 성찰하는 대신 이들에 대한 혐오로 쉽게 전가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남초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이런 우려를 ‘페미니즘의 모함’ 즈음으로 치부해버리며 다시금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여성혐오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멤버 중 한 명인 쵸단의 페미니즘에 대한 과거 발언이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여대 출신인 그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비속어를 사용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방송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글은 후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성 스트리머들은 집중적으로 남성 시청자들의 ‘사상 검증’ 표적이 됐다. ‘집게 손가락’ 논란을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한 표현이나 행동으로도 얼마나 많은 여성 스트리머들이 ‘페미’라고 낙인찍혀 방송에 타격을 입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쵸단 역시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방송을 안정적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 페미니스트와 자신을 구분 짓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높다. 여대 출신이니 너도 페미 아니냐는 시청자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는 대신, 적극적이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인터넷 방송에서는 곧 생계와 직결되는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런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그래도 잘못된 발언이며 이제 사과해야 한다는 식으로 잘잘못을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다른 질문을 해보자. ‘페미’라는 단어가 욕설이나 사상 검증의 용도로 사용되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거센 백래시 속에서 남성이 주 시청자층을 이루는 여성 BJ에게 페미니즘은 어떤 의미와 언어를 만들 수 있을까? 쵸단이 자신의 방송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해당 발언을 했다면, 페미니즘은 어떻게 인식된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페미니즘은 누구에게 어떤 언어를 제공했고 누군가의 어떤 삶은 설명하지 못했는가?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대중화는 분명 특정 디지털 플랫폼에 활발히 참여할 수 있는 고학력의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고 지적된 바 있다. 이런 계층적·세대적·매체적 편중 속에서, 벗방 BJ와 같이 남성 시청자 다수를 상대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하는 여성에게 페미니즘은 어떤 말 걸기를 해 왔는가, 혹은 애초에 말 걸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가.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연대와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이 결코 속할 수 없는 ‘정상적’ 여성성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로부터의 이탈을 낙인찍는 규범적 담론으로만 경험됐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렇다면 쵸단의 발언은 단지 개인의 오해나 배신이라기보다, 누가 페미니즘의 ‘우리’에 포함되고 누구의 삶이 그 바깥에 머물러도 되는지에 관한, 이미 형성된 구획의 효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백래시의 정치와 플랫폼의 감정 경제 속에서, 페미니즘이 어떤 얼굴을 하고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재단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의 여성들이 서로 다른 위험과 조건 속에서 페미니즘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만 우리는 상이한 조건과 삶의 양식들을 포괄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수민 간사

autumnsoo@snu.ac.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